당간지주의 오후
정계원
바람과 함께 굴산사지를 찾아 왔으나 인기척 하나 없다
붓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산비둘기의 사투리도 사라지고, 승무를 추던 편서풍도 사라지고, 군선강을 깨우던 목탁소리도 사라지고, 초서체로 흔들리던 수양버드나무도 사라지고, 고승의 헛기침도 사라지고, 정중하게 저녁을 맞이하던 범종도 사라지고, 연꽃이 발목을 적시던 연못도 사라지고, 탁발하러간 동자승도 사라지고, 대웅전 뜰아래 달빛도 사라지고, 문설주에 걸린 연등도 사라지고, 내 가슴을 횡단하던 감로수의 절규도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당간지주만 두 팔을 벌린 채 늦은 오후를 반기고 있다
2020년 『시와세계』, 겨울호 발표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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