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39

심은섭 시인/ 북쪽 새 떼들

새 떼들이 뱀 눈알로 날아간다  북쪽으로 간다  청호동* 우체통에서 나와 묘향산 우체통으로 가지만 그  사연 받아 줄  사람, 있을까   50년대 초 화약 냄새 자욱한 어느 겨울, 새 떼들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남쪽 밤하늘에 슬픈 보석으로 박혀 있다는 이야기와 일곱 살배기 새 떼가 어느새 은관銀冠을 쓰고 어린 염소 목청으로 "오마니 오마니" 부르다가 틀니 벗어 놓고 유셩이 되어 대기권 밖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갯배에 질긴 절망을 싣고 나르던 청호동 늙은 새 떼들도 "가가이 오라 더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통일이여 통일이여) 녹슨 철책선 넘어 들국화 핀 본적지를 바라보며 비문이 없는 무덤의 주인이 된다는   늙은 새 떼들의 새 떼들이 가지고(사연을)  묘향산 우체국 앞마당에 풀어 놓지도 못한 채  우체통..

내가 읽은 시 2024.06.18

심은섭 시인/ 회항하지 않는 강

그가 바다로 떠나가던 날,  흰 눈이 내렸다  전나무들은 하얀 얼굴로 허리 굽혀 서 있었다   봄은 두꺼운 빙벽을 뚫고 어김없이 돌아왔다 제비도 약속을 한 것 처럼 돌아와 처마 밑에 사글세를 얻어 놓고 산다 황급히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자정을 통과한 시곗바늘도 아침 아홉시로 되돌아왔다   지난여름에 피었던 패랭이꽃도 한 평 남짓한 우편취급소 주차장에 또 피어 있다   하지만 내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정면을 바라보며 바다로 떠났던 강물은 천 개의 밤을 몰아내던 달이 떠올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월계관을 쓴 내가 회전의자에 앉던 날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어 가는 아궁이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불을 지피는 봄이 와도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바다로 나가 강물의 신발 문수를..

내가 읽은 시 2024.05.20

심은섭 시인/ 궁서체의 여자

궁세체의 여자 허기에 찬 굴둑에 저녁연기를 피워 내려고 그녀는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 보았지만풀잎처럼 흔들릴 뿐,붓끝에 젖은 먹물보다 봄은 더 어두워만 갔다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 보려고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 오거나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달빛이 수수밭에 벗어 놓고 간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오기도 했다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보릿고개를 넘다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도탁발하지 않았다어둠에 그을린 달..

내가 읽은 시 2024.05.06

심은섭 시인/ 『물의 발톱』

달에서 지구의 플라스틱 병이 발견되었다  그 사실을 지구를 향해 황급히 터전했으나   인류가 벌집의 애벌레를 털어 먹었고, 피조개가 소유했던 갯벌을 갈아엎고 세운, 공장 굴뚝의 연기를 들이마신 나팔꽃 성대결절로 나팔을 불지 못해 새벽을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이다 산속 벌목공들의 톱질 소리에 숲들이 원형탈모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산새들이 또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입에 거품을 물고 쓴 기사 하나 없다    신문을 읽던 빗방울들이 치를 떨며 강가에 모여 완강한 쇠사슬의 스크랩을 짜고 황톳빛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발톱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 발톱으로 지상의 모든 길을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어떤 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웠다 종족 번식을 위해 여름밤과 협상하던 달맞이꽃의 생식기마저 알뜰하게 거세하고 말았다..

내가 읽은 시 2024.04.27

안이숲 시인/멸치 똥

멸치 똥을 깐다 변비 앓은 채로 죽어 할 이야기 막힌 삶보다 긴 주검이 달라붙은 멸치를 염습하면 방부제 없이 잘 건조된 완벽한 미라 한 구 말을 걸어온다 바다의 비밀을 까발려줄까 삶은 쓰고 생땀보다 짜다는 걸 미리 알려줄까, 까맣게 윤기 나는 멸치 똥 죽은 바다와 살아 있는 멸치의 꼬리지느러미에 새긴 셈세한 증언 까맣게 속 탄 말들 뚠눈으로 말라 우북우북 쌓인다 오동나무를 흉내 낸 종이 관 속에 오래 들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팔려온 누군가의 입맛이 된 주검 소금기를 떠난 적이 없는 가슴을 모두 도려낸 멸치들 육수에 풍덩 빠져 한때 뜨거웠던 시절을 우려낸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뼈를 남기고 객사한 미련들은 집을 떠나온 지 얼마만인가 잘 비운 주검 하나 끓이면 우러나는 파도는 더욱 진한 맛을 낸다 -출처 :..

내가 읽은 시 2024.04.03

심은섭 시인/퇴사역

퇴사역 심은섭 사십 년 가까이 새벽마다 어둠 속으로 길을 내던 어떤 사내가 출근인식기에 마지막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들어선다 책상 위의 만년과장 명패를 반납한 늦은 저녁, 늑골이 헐거워진 몸으로 퇴근길에 오른다 그가 전동열차 의자에 몸을 기대자 지난날들이 흑백무성영화처럼 스쳐갔다 병원비 미납으로 전세금이 압류 당하던 날, 인주밥보다 더 붉게 울던 일이며, 전깃줄보다 더 늘어진 공복으로 생이 경련을 일으키던 날들이며, 밤마다 외딴섬 물개울음소리를 들으며 살던 날들이며, 삶이 속도에 중독된 타이어처럼 조련되어 눈 밑의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던 날들이며, 험상한 IMF로 운명의 삽질이 중단되기도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겪어온 수난의 기억을 시나브로 말아 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전동열차 안에..

내가 읽은 시 2023.12.26

심은섭 시인/쇠똥구리는 쇠똥을 먹지 않는다(생태시)

쇠똥구리는 쇠똥을 먹지 않는다 심은섭 마구간 옆 가죽나무 뿌리에 사글세로 사는 그는 007 제임스 본드를 뺨친다 황소항문에서 생을 마감한 별똥이 떨어지면 잽싸게 맨발로 달려간다 누구는 그를 담벼락에 포물선의 오줌발을 그리는 만취된 사내라고 했고, 혹은 속눈썹이 없는 절세미민이라고 했다 그의 섬뜩한 톱날집게를 보면 저승으로 흐르는 요단강의 뱃사공이고 그를 쇠똥 속에 갇힌 천형天刑이라고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경멸하던 사람들, 제 별똥을 밟으며 날마다 축제의 샴페인을 터뜨릴 때, 그는 지구를 살릴 경단을 빚고 있다 그것은 불평의 치매에 걸린 사람들 입에 넣어줄 형이상학적 경단을 빚는 일인데도 혓바늘이 돋아나 수척해 보이는 지구 신음소리를 내며 오늘도 지처 가고 있다 -심은섭 시집 『천마총엔 달이 뜨지..

내가 읽은 시 2023.10.16

심은섭 시인/퇴사역

사십 년 가까이 새벽마다 어둠 속으로 길을 내던 어떤 사내가 출근 인식기에 마지막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들어선다 책상 위의 만년 과장 명패를 반납한 늦은 저녁, 늑골이 헐거워진 몸으로 퇴근길에 오른다 그가 전등 열차 의자에 몸을 기대자 지난날들이 흑백 무성영화처럼 스쳐 갔다 병원비 미납으로 전세금이 압류당하던 날, 인주밥보다 더 붉게 울던 일이며, 전깃줄보다 더 늘어진 공복으로 생이 경련을 일으키던 날들이며, 밤마다 외딴섬 물개 울음소리를 들으며 살던 날들이며, 삶이 속도에 중독된 타이어처럼 조련되어 눈 밑의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던 날들이며, 험상한 IMF로 운명의 삽질이 중단되기도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겪어 온 수난의 기억을 시나브로 말아 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전동 열차 안에서..

내가 읽은 시 2023.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