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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랭지배추의 수난기

고랭지배추의 수난기 정계원 초록 머리의 그들이 고랭지 밭에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다 도시의 골목바람이 푸른 진액을 빨아먹으려고 그의 정수리에 화학약품을 뿌린다사약을 받아먹듯이 환각제를 받아먹은 날부터그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던무당벌레는 온전하게 시력을 잃어간다어제부터배추흰나비의 부고장이 우편함에 꽂혀 있고후각을 잃은 두더지는 식음을 전폐한 채긴 밭을 일구지 못하고 있다아카시아나무에는 어떤 벌나비도 날아들지 않아불임증에 시달리고 있다살충제에 맥없이 폐허가 된 땅의 울부짖음을 깃발을 높게 단 빌딩들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몇 겹의 탈을 쓴 자본의 짐승들, 오늘도 드론을 띄워 하얀 공포탄을 난사한다 -출처 : 2026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53호)-----------------------------..

정계원 시인/ 부엉새와 초허

강릉군 사월면 노동리 71번지에 어둠이 짙게 내린 저녁 다섯 살 된 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부엉새 울음소리가 귓불에 가득 고이는 밤, 덕실리에 품앗이 갔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등잔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친구는 적막뿐이고, 등잔불은 문밖의 짐승 우는 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풀벌레소리가 섬돌 위에 하얗게 쌓인다 고요 한 겹이 아이의 무릎 위에 더 쌓여도 아이는 기다림에 흔들리지 않는다 달빛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감나무, 그 나뭇가지에서 아이의 불안을 키우는 부엉새, 먼 길 치맛자락 끄는 소리, 등에 달빛을 가득 지고 오는 어머니, 문종이에 싸인 약과를 내준다 아이가 달려드는 품이 봄날 같아서 눈물이 저녁강처럼 흐른다 밤이 깊어도 부엉새 울음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는 엄마의 품..

김학주 시인/ 메밀꽃밥에 동이

메밀꽃밭에 동이 김학주 달빛이 쏟아지는 메밀밭에 흰 소금이 뿌려져 있다 동이가 없는 봉평 마을, 허 생원이 당나귀에 동이를 태우고 달빛을 따라가던 길을 나도 걸어가 본다 호박엿을 파는 품바가 신명 나게 난장판을 벌이는 봉평장터,황톳길을 넘어오던 여인들의 치맛자락 끄는 소리에 장단 맞춰 낮달도 취해 있다 물레방아가 허무를 안고 돌아가는 칠흑의 밤, 긴 머리칼을 뒤따라온 한 사내가 어깨를 웅크리고 방앗간으로 스며든다 동이의 출생 역사를 두 사람이 물레방앗간 황토 바닥에 새기고 있다 어디선가 발정하는 당나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지나가던 달빛 그림자도 강 건너 장터 국밥집 저녁연기와 애무를 한다 하현달은 배를 깔고 서산을 넘고흰 소금꽃들은 동이의 발자국을 따라 지천으로 피고 있다봉평장터 곳곳에 스며..

내가 읽은 시 2026.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