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울음소리 29

2024년 『시현실』가을호/ 내 마음에'호수'가 고여있다

내 마음에 ‘호수’가 고여있다  정계원   내 정신의 긴 언덕에 초허의 생가가 있다 부흥새 우는 저녁도 있고초허와 동행하던 유년의 허기도 보인다 스무 살의 연둣빛 잎새로 현해탄을 건너가고독에 시달리며 상아탑을 쌓던 그가앙칼진 열도에 저항하며 오랫동안 머물렀다고양된 정신으로의지의 문신처럼 태극기를 가슴속에 새기고한반도로 돌아왔다긴 칼이 번득이는 식민지의 날들과붉은 깃발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함흥의 밤,스스로 단단한 붉은 이념의 어둠을 깨며철책을 넘는다서울 신촌의 배꽃학당의 교단에 올라 식민의 칼날에 쓰러지는 잠든 지성의 나무들을 흔들어 깨웠으리라1968년 1월, 그의 발자국은 망우리에서 멈추었다 하지만,사천샛돌길에 여섯 권의 시꽃이 피어나지독한 나의 무지한 겨울을 녹이고 있다  출처-2024,가을..

나의 울음소리 2024.11.09

정계원 시인/태풍에 도끼눈이 있다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어깨가 넓은 관공서로부터 행사홍보용 현수막을 철거하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철거하던 그곳에 갔을 때, 생의 난간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치는 현수막을 보았다 저 도끼눈에는 자비란 없다 꺾이지 않으려고 땅에 허리가 닿도록 굽혔다가 다시 뒤로 젖히는 호객풍선, 비닐봉지도 감나뭇가지에 걸려 온몸으로 저항하며 떤다   그럴수록 도끼눈은 떼를 지어 몰려와 아우성치는 그들을 죽음의 굴레로 씌우고 있다 중천을 걸어가던 낮달마저 걸음을 멈추고 납빛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골전된 한 장의 현수막이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어떤 순찰차도 구급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손톱이 다 빠지도록 몸부림치지만, 봄 같은 어떤 손길 하나 보이지 않는다  -..

나의 울음소리 2024.06.28

정계원 시인/ 초허의 목격자들

나의 거문고가 운다그 악기가 울 때면 초허가 지상으로 출현한다그 악기가 울 때면 돌이 피고, 성좌가 영글고그 악기가 울 때면 빈 들판이 사라지고그 악기가 울 때면 실명한 호수가 눈을 뜨고, 파초의 꽃이 핀다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눈빛이 살아나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고독이 죽어가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이별이 여물어가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그 문이 열릴 때면 초허의 뒤안길이 보이고그 문이 열릴 때면 검은 바람이 찾아오고그 문이 열릴 때면 초허가 떠나가고그 문이 열릴 때면 제비꽃이 초허를 찾는다 여섯 개의 현과 파초, 그리고 하는,38선과 진주만의 목격자로 내가 남는다     -출처 : 2024년 『시와 시학』 여름호 발표작

나의 울음소리 2024.06.28

부엉새와 초허/정계원

부엉새와 초허 정계원 강릉군 사월면 노동리 71번지에 어둠이 짙게 내린 저녁 다섯 살 된 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부엉새 울음소리가 귓불에 가득 고이는 밤, 덕실리에 품앗이갔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등잔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친구는 적막뿐이고, 등잔불은 문밖의 짐승 우는 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풀벌레소리가 섬돌 위에 하얗게 쌓인다 고요 한 겹이 아이의 무릎 위에 더 쌓여도 아이는 기다림에 흔들리지 않는다 달빛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감나무, 그 나뭇가지에서 아이의 불안을 키우는 부엉새, 먼 길 치맛자락 끄는 소리, 등에 달빛을 가득 지고 오는 어머니, 문종이에 싸인 약과를 내준다 아이가 달려드는 품이 봄날 같아서 눈물이 저녁강처럼 흐른다 밤이 깊어도 부엉새 울음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는 엄마..

나의 울음소리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