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등단 시평

정계원 - 등단 심사평

정계원 시인 2021. 6. 13. 17:30

[2007<시와세계 >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냐카페 4편/정계원

 

케냐

어딘가에 케냐를 두고 나는 돌아왔다

유리창에 어리는

케냐를 떠올리며

가슴 큰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서

하얀 자스민 꽃처럼 떠 있는 동물들이

스크린에 비칠 때 수입산

석류를 까먹던 오전

나는 케냐에 와 있다

눈덥힌 녹색의 중국차를 마시고 있다

와인 맛나는 블랙베리도

겨울엔 어쩜,

사막을 뛰어 다니는 기린도

눈동자에 비친 킬리만자로도

얼룩말 마사이족의

케냐마사이AA도 좀 그래

케냐 유리창으로 하얀

치어 떼들이 몰려들고 있다

나는 석류알갱이를 터트리며

아웃오브 아프리카 영화*를보는 것이 더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내 인생에 행운이 찾아오는게 아닐까

낡은 녹색 코트 깃을 치켜올리며

케냐를 떠올렸다

발등 위에 하얀 소나타를 떠올린다

눈발이 날리던 날

 

*아웃 오브 아프리카케냐의 커피농장 배경

 

란다가 있는 겨울 /정계원

 

겨울 바람 사이로 고드름이 자란다

베란다에서 키우던 잉꼬가 죽었다

사라진 날개가 퍼드덕거렸지만

둥지 속 새끼가 튀어나와 자꾸

유리창에 부딪힌다

눈물이 아이들 눈 속에서 얼어붙었다

머리에 살롱수건을 쓴

엄마의 파마머리를 본 적이 있다

일그러진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새 둥지 곁에 멍하니 서 있는

퍼드덕거리는 날개를

차가운 유리창에 부딪히는 태양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느린 속도로 흘러나오는

레드와인이 쏟아진 시간을 채운다

까망베르치즈*와 양송이로 토핑을 완성한다

이 겨울에 웃음소리로 퍼져나가

오후의 햇빛이 자글거린다

포크와 나이프를 꽂은

도미노피자 위로

환하게 핀 엄마의 웃음이 퍼져간다

 

왕케촉의 요가* /정계원

 

김 서린 거울을 닦듯 가부좌로 있었다

피리소리에 온몸이 복식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두박근 나무가 되고 팔이 나무를 안고 들어가고 있었다

발바닥을 잡아당기는 외발자세 천장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물구나무 선 채 구름을 받쳐든 여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햇살사이로 고개

내밀고 그를 보고 있었다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비누거품 축축한

혓바닥은 그녀의 알몸을 핥고 있었다

비눗방울이 꿈틀거리며 말없이 타일

바닥에 죽어 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사월의 유언이 쓰여지고 있었다

신발이 그녀를 신고 꿈틀거리는

구름 계단을 밟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흔들리는 억새 바람 속에

관절이 서걱대고 있었다

 

*나왕 케촉티벳 출신의 세계적인 명상음악가

 

더풀 강릉 /정계원

 

웃음 꽃 피었네

강릉처자들

왕벚꽃 가지마다

햇살 터트리는

경포대 가는 길

왕벚꽃 피었네

강릉우체국 모퉁이에

산수유 꽃 피었네

탱자나무 꽃 마른 뒤에

강릉정보화 마을 뼝창에

팥배나무 꽃 피었네

개나리꽃 마른 뒤에

강릉도서관 창문 밖에

개복숭아 꽃 피었네

홍매화 마른 뒤에

강릉 남대천 잠수교 건너

강릉KT 관사 앞에

쥐똥나무 꽃 피었네

강릉 주유소 울타리 너머

명자나무 꽃 마른 뒤에

 

도방 /정계원

 

팔각 다기함 위에 놓여있는 귀알 분청 사발과

다기함 밑에 눌려있는 팔각 다기함

그 다기함 옆에 놓인 화로와 다관

돌돌 말린 찻잎과 팔팔 끓는 물 사이

다완 그림자와 창문밖에 비치는 햇살

책상 위에 컴퓨터와 창문 틈

다기와 책갈피 사이

탁자 위엔 오렌지

두어 개

반쪽 남은 오이와 그리고

하얀 융털

 

[당선소감]

 

구름 여자

 

손가락 끝에 쥐가 나지요

컴퓨터 속으로 자판기로 구름을 깎아요

구름 쌓는 여자, 나는

머리에 쥐가 나도록 구름을 쌓지요

마우스로 구름을 깎아요

비명을 지른 구름이 내 머릿속에 와글거려요

나만의 구름을 쌓기 위해 한동안 씹고, 싸고, 토해요

머리에 쥐가 자라요 여자는,

구름이 되어요

구름 여자가 될 수 있도록 채찍질해준 문우, 구름의 자존심을 가지고 구름여자가 될 수 있도록 지도편달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랑으로 변신의 길을 열어주신 시부모님, 키 작은 아저씨, 구름만 밟고 정진하겠습니다.

 

[시와 세계 신인상 심사평]

 

  일상과 환상의 변증법

 

  정계원의 '케냐 카페' 4편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뽑는다. 그가 보여주는 시적 특성은 한 마디로 일상과 환상의 변증법이다. 이런 변증법이 소중한 것은 일상이 없는 환상도 없고 환상이 없는 일상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의 우리 젊은 시인들, 특히 환상파들이 보여주는 시적 한계는 일상과 환상의 변증법에 대한 무지이고 이런 무지에 대한 무지가 우리시의 한계이다.

  그런 점에서 정계원의 시는 최소한 이런 무지를 극복한다. 그의 경우 일상 이 환상을 낳고 환상이 일상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케냐 카페'는 아름다운 시이다. 그는 어딘가에 케냐를 두고 돌아온다. 그러나 케냐는 그의 일상을 지배하고 그의 시는 일상과 환상 사이에서 진동한다.

 

  케냐

  어딘가에 케냐를 두고 나는 돌아왔다

 

  유리창에 어리는

  케냐를 떠올리며

  가슴 큰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서

  하얀 자스민 꽃처럼 떠 있는 동물들이

  스크린에 비칠 때 수입산

  석류를 까먹던 오전

 

  그는 케냐로 간다. 케냐는 어디인가? 아프리카 동부 작은 나라인가? 케냐, 이디오피아, 소말리아 모두 환상일 뿐이다. 그 환상 속엔 기린, 얼룩말, 코끼리, 사자 등이 달리고 이런 동물들이 야성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영화를 매개로 하는 이런 환상에 의해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인생에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낡은 녹색 코트 깃을 치켜올린다. 환상이 일상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을 사랑하자. 사는 건 아플 때가 많고 비 오는 날이 많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저녁도 많다. 그러나 케냐가 있다. 케냐가 구원이다. 이런 환상은 베란다가 있는 겨울에서는

 

  포크와 나이프를 꽂은

  도미노피자 위로

  환하게 핀 엄마의 웃음이 퍼져간다

 

  처럼 죽음을 매개로 하는 일상의 행복을 지향한다. 잉꼬가 죽고 새끼가 둥지에서 튀어나와 유리창에 부딪치는 이미지가 태양의 일그러진 얼굴로 변주되는 것도 좋고 마침내 엄마의 웃음으로 전환되는 것도 좋다.

 

심사위원 이승훈 <시인. 한양 대학 교수>

송준영 <시인. 시와 세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