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세체의 여자
허기에 찬 굴둑에 저녁연기를 피워 내려고 그녀는
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 보았지만
풀잎처럼 흔들릴 뿐,
붓끝에 젖은 먹물보다 봄은 더 어두워만 갔다
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 보려고
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 오거나
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
달빛이 수수밭에 벗어 놓고 간
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오기도 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
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
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
보릿고개를 넘다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도
탁발하지 않았다
어둠에 그을린 달의 영혼을 닦아 주려고
새벽마다 화선지에 천 그루의 사과나무를 그렸다
그녀가
한평생 눈물을 찍어 쓴
궁서체 편액 한 장이 오래도록 내 몸속에 걸려 있다
-출처 : 시집 : 『물의 발톱』 천년의 시작,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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