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심은섭 시인/ 회항하지 않는 강

정계원 시인 2024. 5. 20. 06:16

  그가 바다로 떠나가던 날,

  흰 눈이 내렸다

  전나무들은 하얀 얼굴로 허리 굽혀 서 있었다

 

  봄은 두꺼운 빙벽을 뚫고 어김없이 돌아왔다 제비도 약속을 한 것 처럼 돌아와 처마 밑에 사글세를 얻어 놓고 산다 황급히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자정을 통과한 시곗바늘도 아침 아홉시로 되돌아왔다

 

  지난여름에 피었던 패랭이꽃도 한 평 남짓한 우편취급소 주차장에 또 피어 있다

 

  하지만 내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정면을 바라보며 바다로 떠났던 강물은 천 개의 밤을 몰아내던 달이 떠올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월계관을 쓴 내가 회전의자에 앉던 날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어 가는 아궁이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불을 지피는 봄이 와도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바다로 나가 강물의 신발 문수를 찾아와

  내 기억의 횃대에 걸어 두었다

 

 

  출처-시집 《물의 발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