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김학주 시인/ 메밀꽃밥에 동이

정계원 시인 2026. 8. 29. 00:52

메밀꽃밭에 동이

 

김학주

 

 

달빛이 쏟아지는 메밀밭에 흰 소금이 뿌려져 있다

동이가 없는 봉평 마을,

 

허 생원이 당나귀에 동이를 태우고

달빛을 따라가던 길을 나도 걸어가 본다

 

호박엿을 파는 품바가

신명 나게 난장판을 벌이는 봉평장터,

황톳길을 넘어오던 여인들의 치맛자락 끄는 소리에

장단 맞춰 낮달도 취해 있다

 

물레방아가 허무를 안고 돌아가는 칠흑의 밤,

긴 머리칼을 뒤따라온 한 사내가 어깨를 웅크리고

방앗간으로 스며든다

 

동이의 출생 역사를

두 사람이 물레방앗간 황토 바닥에 새기고 있다

 

어디선가 발정하는 당나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지나가던 달빛 그림자도

강 건너 장터 국밥집 저녁연기와 애무를 한다

 

하현달은 배를 깔고 서산을 넘고

흰 소금꽃들은 동이의 발자국을 따라 지천으로

피고 있다

봉평장터 곳곳에 스며 있는 허생원의 뼈아픈 슬픔

 

역사는 푸른 산맥처럼 살아 있으나

허 생원과 동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나도 없다

 

 

-출처: 시집 이마엔 실직의 주름살이 강물처럼 흐르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