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발표 시

고랭지배추의 수난기

정계원 시인 2026. 9. 20. 23:20

고랭지배추의 수난기

 

 

정계원

 

 

 

초록 머리의 그들이 고랭지 밭에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다

 

도시의 골목바람이 푸른 진액을 빨아먹으려고

그의 정수리에 화학약품을 뿌린다

사약을 받아먹듯이 환각제를 받아먹은 날부터

그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던

무당벌레는 온전하게 시력을 잃어간다

어제부터

배추흰나비의 부고장이 우편함에 꽂혀 있고

후각을 잃은 두더지는 식음을 전폐한 채

긴 밭을 일구지 못하고 있다

아카시아나무에는 어떤 벌나비도 날아들지 않아

불임증에 시달리고 있다

살충제에 맥없이 폐허가 된 땅의 울부짖음을

깃발을 높게 단 빌딩들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몇 겹의 탈을 쓴 자본의 짐승들,

오늘도 드론을 띄워 하얀 공포탄을 난사한다

 

 

-출처 : 2026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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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북평 민속오일장

 

 

정계원

 

 

 

뒷뚜르장이 서면 청옥산을 넘던 뭉게구름도 내려온다

 

동해 피마름골에 사는 복분자도 이른 새벽부터 찾아와

빨간 모자를 쓰고 전천箭川 옆 장터를 거닐고 있다

새벽부터 신선봉의 눈치를 살피던

수탉은 암탉의 알을 훔쳐 팔아 번 돈으로

이미 낮술에 취해

나무 그늘에서 체면을 구긴 채 낮잠을 자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름이 호명되는

앉은뱅이호박,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아직도 맺혀있다

푸른 등에 파도소리가 남아있는 고등어도 보인다

 

소쿠리엔 과일보다 아랫목처럼 따스한 정이 수북하게

담겨있는 축제의 장,

북평동 모퉁이의 나무창살 방앗간에서는 요금도 없이

고소한 맛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다

200년의 나이테로 좌판모서리가 낡고 닳아지듯이

북평 주민들의 마음도 둥글어져 누가 그냥 지나치랴

 

닷새마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북평 종합페스티벌

임진왜란 때 전천으로 떠내려온 전사자의 피와 화살이

이젠, 동해안 사람들에게 웃음꽃을 피워주고 있다

 

 

-출처 : 2026년 계간지 『동안』 가을호(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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