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정계원 시인 2022. 3. 11. 14:06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베어 묶어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첫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출처-2021년 여름호 계간 사이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