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설날 아침
버스정류장 의자 앞에 놓인 연탄 한 장
그 곁에 소주병들이 널브러졌다
쓰러진 빈 술병은 어둠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길바닥에 주저앉은 엉뚱한 연탄 한 장, 포장이 반쯤 뜯긴 번개탄
불길하다
죽음의 입구가 열려 있다
퓨즈가 나간 막다른 끝을 잡고
소주병이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누군가를 들이켜는 동안
어둠의 아가리는 얼마나 사나웠을까
삼키고 뱉어내고 또 삼킨 마지막 결심은
너덜너덜 찢겨나갔을 것이다
추위에 떨던 소주병이 제 속을 다 비우는 동안
연탄과 번개탄은 제 몸을 살라 또 누군가를 사르려고 했을까
생의 막차마저 놓친 그믐달은
이곳에서 어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캄캄한 그믐밤을 들고 떠난 빈자리
곱게 설날을 차려입은 일가족이
힐끔 쳐다보고 버스에 오른다
2022년 문예지《창작21》 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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