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마경덕/그믐이 앉았던 자리

정계원 시인 2022. 6. 12. 22:15

이른 설날 아침

버스정류장 의자 앞에 놓인 연탄 한 장

그 곁에 소주병들이 널브러졌다

쓰러진 빈 술병은 어둠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길바닥에 주저앉은 엉뚱한 연탄 한 장, 포장이 반쯤 뜯긴 번개탄

불길하다

죽음의 입구가 열려 있다

 

퓨즈가 나간 막다른 끝을 잡고

소주병이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누군가를 들이켜는 동안

어둠의 아가리는 얼마나 사나웠을까

삼키고 뱉어내고 또 삼킨 마지막 결심은

너덜너덜 찢겨나갔을 것이다

 

추위에 떨던 소주병이 제 속을 다 비우는 동안

연탄과 번개탄은 제 몸을 살라 또 누군가를 사르려고 했을까

생의 막차마저 놓친 그믐달은

이곳에서 어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캄캄한 그믐밤을 들고 떠난 빈자리

 

곱게 설날을 차려입은 일가족이

힐끔 쳐다보고 버스에 오른다

 

 

2022년 문예지《창작21》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