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년 가까이 새벽마다 어둠 속으로 길을 내던 어떤 사내가 출근 인식기에 마지막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들어선다
책상 위의 만년 과장 명패를 반납한 늦은 저녁,
늑골이 헐거워진 몸으로 퇴근길에 오른다
그가 전등 열차 의자에 몸을 기대자 지난날들이 흑백 무성영화처럼 스쳐 갔다 병원비 미납으로 전세금이 압류당하던 날, 인주밥보다 더 붉게 울던 일이며, 전깃줄보다 더 늘어진 공복으로 생이 경련을 일으키던 날들이며,
밤마다 외딴섬 물개 울음소리를 들으며 살던 날들이며, 삶이 속도에 중독된 타이어처럼 조련되어 눈 밑의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던 날들이며, 험상한 IMF로 운명의 삽질이 중단되기도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겪어 온 수난의 기억을 시나브로 말아 올리며 상념에 젖어 있을 무렵, 전동 열차 안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퇴사역, 퇴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양쪽입니다"
-출처, <시작>2023년 여름호 통권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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