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어깨가 넓은 관공서로부터 행사홍보용 현수막을 철거하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철거하던 그곳에 갔을 때, 생의 난간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치는 현수막을 보았다 저 도끼눈에는 자비란 없다 꺾이지 않으려고 땅에 허리가 닿도록 굽혔다가 다시 뒤로 젖히는 호객풍선, 비닐봉지도 감나뭇가지에 걸려 온몸으로 저항하며 떤다
그럴수록 도끼눈은 떼를 지어 몰려와 아우성치는 그들을 죽음의 굴레로 씌우고 있다 중천을 걸어가던 낮달마저 걸음을 멈추고 납빛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골전된 한 장의 현수막이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어떤 순찰차도 구급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손톱이 다 빠지도록 몸부림치지만, 봄 같은 어떤 손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출처 : 2024년『시와시학』 여름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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