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지(破紙)의 도시
김원경
청량리 재개발구역에는
이상하게도 점집이 많았다
철거 예정이라 적힌 붉은 글자 주위로
점집의 깃발이 물고기 비늘처럼 파닥거렸다
이 도시는 왜 무너지기 직전이 되면
무당부터 늘어나는 걸까
벽이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현실 대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부터 붙잡을려는지도 모른다
이 동네는 본래 터가 약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밤이 너무 오래 젖어 있었을 뿐
그리하여 이미 결정된 예언이라는 그물 속에
스스로 결려 살아가게 된 자들
청량리의 독방들은 저마다
젖은 외투 속에 잃어버린 주소를 숨기고 있었으리라
바다를 빼앗기고 마른 개울로 밀려난 물고기 떼처럼
지워질 날을 기다리는 저 밀려난 사람들의 흔적들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을 견디며
빈 내장처럼 환하게 켜진 어둠 속을 걸어갈 때
지워지는 주소들은 서로의 뺨을 감는 전선이 된다
결국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운세의 배를 가르고
끝내 자신의 주소를 잃어버리는 오래된 파지 같은 것이어서
출입제한구역이라는 붉은 페인트가 마르는 밤이 오면
입안에서 성에처럼 서글프게 기어나오는 물고기 비늘을 뱉으며
우리는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가장 가난한 슬픔의 주인이 된다
-출처 : 시현실 2026년 여름호에서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심은섭 시인/ 목백일홍 (0) | 2026.08.29 |
|---|---|
| 심은섭 시인/8월의 셀프 다비식 (0) | 2026.08.29 |
| 천융희 시인/ 빈집의 수식어 (0) | 2026.07.21 |
| 고형렬 시인/ 한 편의 단편소설만 못하다 (0) | 2026.07.08 |
| 김학주 시인/길위의 달 (0) | 2026.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