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늙은 도둑의 오후/심은섭 시인

정계원 시인 2022. 7. 4. 08:26

늙은 도둑의 오후

 

심은섭

 

 

이 지상에 잠시 들렸다가 많은 것을 훔쳤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거니와

신의 재산목록에서도 삭제될 수 없는 장물들이다

 

한 평생 나는 도둑으로 살아왔다

성탄저녁에 어느 도심의 슬래브집 지붕아래에서

꽃녀* 한 송이를 보쌈 했다

그때 우체국의 출입문 돌쩌귀가 닳도록

강건체로 주절거린 편지 수십 통을 날려 보냈고

사기 치다시피 했다

 

원적지가 어딘지 해독할 수 없는

살찐 박달나무 모종 두 그루를 대낮에 또 훔쳤다

그들은 애증의 볕을 받아 잘 자랐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낸 채

시조부의 허락도 없이 버젓이 족보에 올렸으나

나를 훔친 시조부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박달나무가 훔쳐온 손자묘목을 은닉한 장물아비,

오후쯤, 천국경찰서로부터

구류처분 출두명령서가 곧 도착하리라

 

 

 

*꽃 같은 여자

 

 

-출처 : 2022시와세계여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