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도둑의 오후
심은섭
이 지상에 잠시 들렸다가 많은 것을 훔쳤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거니와
신의 재산목록에서도 삭제될 수 없는 장물들이다
한 평생 나는 도둑으로 살아왔다
성탄저녁에 어느 도심의 슬래브집 지붕아래에서
꽃녀* 한 송이를 보쌈 했다
그때 우체국의 출입문 돌쩌귀가 닳도록
강건체로 주절거린 편지 수십 통을 날려 보냈고
사기 치다시피 했다
원적지가 어딘지 해독할 수 없는
살찐 박달나무 모종 두 그루를 대낮에 또 훔쳤다
그들은 애증의 볕을 받아 잘 자랐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낸 채
시조부의 허락도 없이 버젓이 족보에 올렸으나
나를 훔친 시조부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박달나무가 훔쳐온 손자묘목을 은닉한 장물아비,
오후쯤, 천국경찰서로부터
구류처분 출두명령서가 곧 도착하리라
*꽃 같은 여자
-출처 : 2022년 《시와세계》 여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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