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박주택 시인/주거지

정계원 시인 2022. 12. 20. 01:11

   거기 누군가의 밤이 되자 여름이 시작되었다 약수동에서도 밤이 온다 가장 늦게 제과점은 문을 닫고 생선 가게 청년은 기면증을 앓는지 생선과 더불어 곪아간다  전생애의 계단을 바치는 2층 당구장 그것보다 많은 휠체어들 평온도 없이 가게들은 문을 여닫고 아무렇게나 핀 풀들은 시멘트 사이를 메우고 있다 이것을 지나치고 좁은 길을 넓히며 가는 차들 한쪽으로 비켜서며 무르익는 공포들

 

  끝끝내 우리가 살았듯이 우리가 없어도 우리가 쓰지 않아도 골목 골목은 빛나고 구역구역 죽은 자들만이 시들는 시장 입구로 몰리며 여기서 고기를 사고 떡을 사고 혼례처럼 사랑을 옮겨 퍼뜨렸다고 술에 젖어 발자국마다 노래를 흩부렸다고 이렇게 내가 살던 곳이라고 펴지지 않는 손가락 마디를 편다

 

  844번지 우뚝 솟은 아파트 그 많은 집을 헐고 쿠테타의 함성처럼 이토록 밝게 거대한 그 아래 납작 엎드린 가게들은 이마 위에 전구를 달아 놓았다 노인 복지 회관을 실어나르는 버스 한 대 정거해 있는 좁은 틈을 빠져나온 한 아이 처량한 마음을 몸채로 들여놓았는지 새로 쓰는 노트와 같이 동네를 환하게 만들며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2022년 문예지<시와 시학>겨울호에서

 

 

   박주택 1986경향신문으로 등단. 시집 꿈의 이동 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간의 동공,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등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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