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39

이영춘 시인/성 밖에서

성 밖에서 이영춘 성 밖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풀잎 같은 사람들, 누가 부르는 이도 없고 가라는 사람도 없다 기웃기웃 카프카의 k처럼 성문 밖에서 기웃거린다 저 안에는 무수한 이름들과, 이름표를 단 사람들이 군주를 향해 몰려 있다 아니, 군주가 자신의 위력을 위해 명성을 위 해 불러들인 이름들이다 먼발치에서 불빛 바라보듯 성안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풀잎들이 빗물처럼 흔들린다 아득한 저 하늘 끝 뭉게구름 한 점 둥둥 떠 흘러가듯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의 궁정 같은 성, 그 성 밖에서 풀잎들은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다 지쳐 다시 풀잎으로 눕는다 시집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 실천문학사, 2021.

내가 읽은 시 2022.01.03

심은섭 시인/ 만삭의 여인2

만삭의 여인2 심은섭 시인 그는 태아의 역마살을 지우려고 정갈한 의식을 치르고 난 뒤, 궁궐 한 채를 짓기 시작했다 서른 살의 주춧돌 위에 잘 다듬은 행운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은 늪에서 홀로 잘 익은 갈대로 엮고, 암반수로 반죽한 황토를 발랐다 사계절 부활하는 산맥과 싱싱한 새벽종소리가 떼 지어 몰려오도록 동창을 냈다 먼 길을 떠날 때 좌표로 삼을 북두칠성이 보이도록 지붕은 무명천으로 씌웠다 질긴 모성애로 담장을 치고 밤이 주도하는 집회를 막으려고 문설주에 외등도 달았다 사방을 살핀 뒤에 실눈의 산짐승들의 수상한 이동을 감시하려고 망루를 세웠다 상수리나무들의 그림자가 성문의 사타구리로 빠져나갈 때 그녀는 궁궐로 들어와 방에 가만히 누웠다 그때 만월의 자궁 속에서 어둠을 깨는 첫울음..

내가 읽은 시 2021.12.16

최소연 시인/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는 뭐할까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는 뭐할까 최소연 나의 열여덟 살 적 별이 빛나던 밤, 내가 절망에 젖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는 나를 빈 방으로 안내했어 나는 그 빈 방에 걸려있는 별이 빛나는 액자 속으로 숨어 버렸지 잘려나간 너의 한쪽 귀를 볼 때 달과 별 사이엔 나의 푸른 어둠이 더 많았고, 앳띤 헛기침소리로 너의 화선지 안에서 오랫동안 살았어 내 몸속의 사이프러스나무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너의 몸 속으로 내가 강물처럼 흘러가던 날들이었어 사방이 각진 방에서 나는 고독의 화석이 되어가고 있어 어둠이,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 같던 또 다른 어둠으로 숨어드는 불혹의 밤, 너의 안부를 물어 오늘도 나는 너가 있을 요양원의 빈 방을 페인팅하고 있어

내가 읽은 시 2021.12.07

진혜진 시인/ 얼룩무늬 두루마리

얼룩무늬 두루마리 진혜진 ​ ​ 너는 나로 나는 너로 감겼던 얼굴이 풀립니다 겹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군요 풀린 것들에서 배웅의 냄새가 납니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을 다녀갑니다 ​ 내려야 할 물도 우주라 욕조에 몸을 띄웁니다 세면대의 관점에서 얼굴은 흐르는군요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 오릅니다 비누거품에서 맹세는 하얗다는 걸 보았습니다 ​ 이제 거울의 시간입니다 위험을 느끼는 것은 숨의 기억 입니다 피를 흘립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얼굴에는 새카만 통로가 생겨납니다 너의 손안에 나를 풀어놓고 얼룩을 통과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내가 읽은 시 2021.12.07

저녁과 밤의 사이에서 - 마경덕

해 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데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저녁의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꽂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보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

내가 읽은 시 2021.06.18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 고형렬

새는 노출되어 있고 물고기는 숨어 있다 새는 불안하고 물고기는 은자이다 그래서 새는 흰 구름이 되어도 좋다고 했고 물고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세상이 끝난 뒤 물고기는 흰 구름이 될 수 없었다 새가 흰 구름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사람이 없는 어느 세상에서인가 흰 구름이 물이 될 때 물고기들은 새가 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은 저 미래의 끝을 향해 노래하며 죽고 살며 흘러갔고 나 외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당도했다 불안한 곳에 살았던 새들이 구름이 될 때까지 흰 구름이 망각하고 물고기가 될 때까지 -출처: 시집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창비시선, 2020.

내가 읽은 시 2021.06.18

나무말뚝 - 마경덕

지루한 생이다 뿌리를 버리고 다시 몸통만으로 이러서다니, 한자리에 붙박인 평생의 불운을 누가 밧줄로 묶는가 죽어도 나무는 나무 갈매기 한 마리 말뚝에 비린 주둥이를 닦는다 생전에 새들의 의자 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온 내력이 전부였다 품어 기른 새들마저 허공의 것, 아무것도 묶어두지 못했다 떠나가는 뒤통수나 보면서 또 외발로 늙어갈 것이다 -출처: 시집 『그녀의 외로움은 B형』, 상상인 시선. 2020.

내가 읽은 시 2021.06.18

심은섭 시인/늙은 바람의 문법

앳된 문장이 늙은 바람의 문법을 숭배하며 짧은 평서문으로 자랐다 그 문법은 통사규칙을 어기지 말 것을 수시로 타전해 왔다 주어가 생략된 의식으로 불규칙한 담장 밖 풍문과 동행하지 말 것을 주문하며 문장의 늑골을 더욱 조였다 그럴수록 문장은 영혼의 목록에서 사라진 뼈다귀를 핥으며 살았다 때론 뒷골목 불나방의 비문을 새기는 석공이기도 했다 세월의 단락이 바뀌어도 손금의 한가운데로 정신이 컴컴한 헛간의 어휘와 총에 맞은 새의 머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문법은 무명의 시간들을 따라 묘혈에 누웠다 슬픔의 독침이 문장의 혈관 속으로 퍼지고, 언어들은 일제히 경련을 일으켰다 굿당을 태워버린 무녀처럼 문장은 포효했다 문법이 없는 대궐보다 무법이 있는 옥탑방 아랫목이 더 따스했다 -출처: 시집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

내가 읽은 시 2021.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