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39

늙은 도둑의 오후/심은섭 시인

늙은 도둑의 오후 심은섭 이 지상에 잠시 들렸다가 많은 것을 훔쳤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거니와 신의 재산목록에서도 삭제될 수 없는 장물들이다 한 평생 나는 도둑으로 살아왔다 성탄저녁에 어느 도심의 슬래브집 지붕아래에서 꽃녀* 한 송이를 보쌈 했다 그때 우체국의 출입문 돌쩌귀가 닳도록 강건체로 주절거린 편지 수십 통을 날려 보냈고 사기 치다시피 했다 원적지가 어딘지 해독할 수 없는 살찐 박달나무 모종 두 그루를 대낮에 또 훔쳤다 그들은 애증의 볕을 받아 잘 자랐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낸 채 시조부의 허락도 없이 버젓이 족보에 올렸으나 나를 훔친 시조부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박달나무가 훔쳐온 손자묘목을 은닉한 장물아비, 오후쯤, 천국경찰서로부터 구류처분 출두명령서가 곧 도착하리라 *꽃 같은 여자 ..

내가 읽은 시 2022.07.04

권우상/전기구이

나는 통닭을 줄줄이 꿴 전기구이를 보면 전기고문이 생각난다. 털이 몽땅 뽑히고 다리가 잘려나간 채 목 마저 떨어져 나간 통닭을 보면 그때의 차디찬 기억이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어느날 검은 선글라스 사내들에 의해 눈 가리고 팔 꺾인 채 끌려간 캄캄한 지하실 무릎 꿇린 채 나의 내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신이여, 차라리 죽게 해주소서 죽음만이 살길이었던 참담한 기억들 창틀 안쪽에서 줄줄이 꿰여 빙빙 돌아가는 피 묻은 살덩이를 보면 나는 자꾸 어지럽고 구역질을 멈추지 못한다 저 닭도 결국 실토하고 말았을까 저 닭은 무엇을 실토했을까 나는 통닭을 줄줄이 꿴 전기구이를 보면 세상에서 제일인간답지 않은 것이 인간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본다 2022. 문예지 《창작21》봄호에서

내가 읽은 시 2022.06.12

마경덕/그믐이 앉았던 자리

이른 설날 아침 버스정류장 의자 앞에 놓인 연탄 한 장 그 곁에 소주병들이 널브러졌다 쓰러진 빈 술병은 어둠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길바닥에 주저앉은 엉뚱한 연탄 한 장, 포장이 반쯤 뜯긴 번개탄 불길하다 죽음의 입구가 열려 있다 퓨즈가 나간 막다른 끝을 잡고 소주병이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누군가를 들이켜는 동안 어둠의 아가리는 얼마나 사나웠을까 삼키고 뱉어내고 또 삼킨 마지막 결심은 너덜너덜 찢겨나갔을 것이다 추위에 떨던 소주병이 제 속을 다 비우는 동안 연탄과 번개탄은 제 몸을 살라 또 누군가를 사르려고 했을까 생의 막차마저 놓친 그믐달은 이곳에서 어느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캄캄한 그믐밤을 들고 떠난 빈자리 곱게 설날을 차려입은 일가족이 힐끔 쳐다보고 버스에 오른다 20..

내가 읽은 시 2022.06.12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가문비나무엔 허파가 없다 심은섭 이동의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칠 때마다 신은 나의 허파를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정집 마당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까마귀가 스무 가지의 감각을 주고 갔지만 눈과 귀를 닫고 삽니다 오랜 시간은 이동의 습성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 죄로 직립의 자세로 저녁마다 굵고 긴 반성문을 씁니다 수은주의 붉은 혓바닥이 빙점 아래로 통과할 때 벌목공의 톱날에 온몸이 잘려 나가도 이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두빛 살점이 뜯겨나가도 피죽바람을 불러와 생손을 앓습니다 나는 어떤 계절에도 한 장의 잎만으로도 천공을 뚫고 부활을 합니다 출처-심은섭 시집『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때』

내가 읽은 시 2022.03.11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길상호 베어 묶어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첫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출처-2021년 여름호 계간 『사이펀』

내가 읽은 시 2022.03.11

심은섭 / 시간의 얼굴1

시간의 얼굴1 분열하는 스물네 개의 얼굴로 그가 달려온다 그때 꽃들은 징을 울렸으며, 눈먼 시계공은 청동시계의 태엽을 감고 있다 그에게 순종을 선언한 강물은 한없이 직선으로 흘렀다 마른 소금을 굽던 바다도 어김없이 앳된 해를 출산 중이다 오후엔 그가 들판을 지나갈 거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사과나무는 각혈로 피워낸 꽃을 입양하기 시작했고, 이마에 화상을 입은 능금은 서둘러 붉은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암사자들은 넓은 사냥터를 급매하려고 총잡이들과 협상이 한창이다 저녁의 입속으로 그가 태양을 밀어 넣는다 그때 어떤 사내가 젖은 몸을 달빛에 말리며 마른 장작처럼 가늘어진 아버지의 두 다리 사이로 예순네 개의 달이 저무는 것을 보고 있다 며칠 전 실종된 크로마뇽인이 끝내 운석으로 발견되었다 심은섭 시집, 『Y셔츠 두..

내가 읽은 시 2022.02.24

수상한 여름/ 심은섭 시인

수상한 여름/심은섭 벽에 걸린 시계추가 여섯시를 타종할 때까지 매미는 울지 않았다 어떤 이는 매미가 하안거 중이라고 소리쳤고, 누구는 내장이 훤히 보이도록 허물 벗느 중이라고 했다 그런 풍문이 들릴 때마다 저녁식사 중인 자작나무숲들리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수양버들나무들은 실어중에 시달렸다 말복이 지나도 매미는 울지 않았다 곳간은 텅 비어 갔고 노모의 등뼈마저 허였게 드러났다 하혈하던 닭들도 어둠 속에서 야윈 그믐달을 산란했다 등굣길을 잊어버린 아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로 자꾸 발을 뻗었다 매미울음의 실종을 묵인하는 동사무소로 목마른 접시꽃이 갈증을 애원하며 보낸 서신이 되돌아오던 날, 귀가를 서두르던 저녁노을의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았지만 공장굴뚝의 검은 혀들은 여전히 허공에서 군무를 즐긴다 보현..

내가 읽은 시 2022.02.04

스카프의 회고혹/심은섭 시인/2018년 1월호 『심상』 발표작

스카프의 회고록 심은섭 나의 스카프는 슬픈 가을 한 장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잘 익은 두어 개의 사랑과 준비하는 이별이 함께 산다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이 있고 시간에 흔들리며 어둠을 푸는 몇 개의 낭만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하얀 눈물 한 방울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내 손금을 닦아주던 강물과 아리아를 불러주던 긴 속눈썹이 산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애증과 달빛이 한 여인의 울음을 비우는 골목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지난여름에 피었던 능소화다 그 스카프 속에는 등이 굽은 세월과 립스틱을 태워버린 홍등가의 백열등이 홀로 산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초가집의 저녁연기와 물집이 돋은 입술로 가난을 물고 있는 유년이 있다 나의 스카프는 철없는 유년의 발자국이다 그 스카프 속에는 푸른 초경의 설렘과 만날 수 없는 평..

내가 읽은 시 2022.01.22

심은섭 시인/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심은섭 옷소매를 통과하던 두 팔이 달아나고, 그 자리에 달의 뒤편으로 뻐어가던 내 어둠이 채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집어삼키고 내 손금마저 사용하고 있었다 나 는 시나브로 아침을 통과하지 못한 저녁으로 자랐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폐경의 꽃이 하혀을 했 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내고 송곳 같은 부리로 나의 어 둠을 쪼아대며 유방 하나를 떠어 내 입술에 걸어 주었다 그럴수록 달아났던 두 팔은 회향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 다 Y셔츠 두 번째 단추를 끼울 때 자본에 조련된 한 구의 시체가 흰 기둥에 걸린 출군 인식기를 통과했다 그는 어 느 누구도 해독하지 못하는 문장이었고 그 두 손엔 아무 도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영정사진이 들려 있었다 심은섭 시집, 『Y셔..

내가 읽은 시 2022.01.06

이영춘 시인/바람과 외투

바람과 외투 이영춘 공기 방울 같은 우울을 싣고 열차를 탄다 고골리의 외투에서 불어온 존재의 욕망처럼 열차는 바람을 싣고 달려간다 손에 잡힐 듯 멀어져 가는 들판과 농부와 산과 산 그림자의 간극, 사람과 사람 사이의 외투는 아득히 멀어지고 고원의 땅으로 가는 열차의 하중은 미개척지의 동굴 같은 미증유의 빙산, 나는 종유석처럼 허공에 떠서 방향을 잃는다 고골리의 도둑맞은 외투 같은 우울을 안고 돌밭 길을 간다 차창을 두드리며 달려오는 빗소리, 죽은 외투의 그림자 박제된 맨살의 그림자가 창에 어린다 긴 강을 건너가는 바퀴의 울음소리 하늘 가득 산화된 외투가 펄럭인다 이영춘 시집, 『그 뼈가 아파서 울었다』, 2021. 실천문학사

내가 읽은 시 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