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도둑의 오후 심은섭 이 지상에 잠시 들렸다가 많은 것을 훔쳤다 다시 돌려줄 수도 없거니와 신의 재산목록에서도 삭제될 수 없는 장물들이다 한 평생 나는 도둑으로 살아왔다 성탄저녁에 어느 도심의 슬래브집 지붕아래에서 꽃녀* 한 송이를 보쌈 했다 그때 우체국의 출입문 돌쩌귀가 닳도록 강건체로 주절거린 편지 수십 통을 날려 보냈고 사기 치다시피 했다 원적지가 어딘지 해독할 수 없는 살찐 박달나무 모종 두 그루를 대낮에 또 훔쳤다 그들은 애증의 볕을 받아 잘 자랐다 가문의 비밀을 드러낸 채 시조부의 허락도 없이 버젓이 족보에 올렸으나 나를 훔친 시조부는 태클을 걸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박달나무가 훔쳐온 손자묘목을 은닉한 장물아비, 오후쯤, 천국경찰서로부터 구류처분 출두명령서가 곧 도착하리라 *꽃 같은 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