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
심은섭
허공이 나의 출생지다 그러므로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지상에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 나의 운명은 자본에 조련된 동전을 등에 업고 결정된 생의 궤적을 그려내는 일이다 이것이 신이 내린 첫 계명이다
오래도록 변두리를 배회하며 사는 동안 두 눈은 퇴화 되었으나 무딘 감각으로 겨우 허공에 길을 낸다 그런 까닭에 운명의 축을 이탈할 수도 없었거니와 갈기를 날리며 광란하는 질주의 본능을 잊어버렸다
밤꽃이 발정하는 유월, 변압기가 구워낸 짜릿한 전류 한 덩어리로 식사를 한다 그것마저 배식이 중단된 날엔 공중에 정박해야 한다 오늘도 고독의 깃발을 나부끼게 만든 개똥벌레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다
2022년 『현대선시·11』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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