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 마네킹
정계원
몸속으로 혈액이 흐르지 않는다
사계절의 쇼를 보여주는 일이 내 업이다 삼월에는 어깨에 봄을 얹어 놓고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당겨야 한다 사람들의 눈길이 다가오지 않을 땐 립스틱을 짙게 바르거나 가슴에 장미꽃을 꽂고 기다려야 한다
팔월에 장마전선이 온다는 풍문이 나돌 때면 이미 나의 치맛자락은 짧아지고 가슴에 여름이 풀어지고 있다 냉방장치가 있으나 팔월의 쇼를 보여야 하므로 매미울음소리로 삼복더위를 식혀야 한다
시월이 오면 두 어깨에 낙엽들이 쌓이고 짧은 치마가 더 길어진다 몸에 걸친 무명천 속으로 들짐승들은 동면에 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고독의 가슴을 태워야 하는 나는 봉화대가 된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12월, 발등으로 흰 눈이 쌓이고 찬바람에 살을 에이는 나의 영혼은 점점 두터워지고 하루 종일 날아들던 새들은 남쪽을 향해 날개를 펼친다
삼백예순날, 웃어야만 하는 전생 업
2021년 문예지『시와 시학』 가을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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