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시현실' 가을호<이 계절의 시인>p229
빈 항아리
정계원
오랫동안 몸을 비우고 장독대에 앉아 있는
그의 몸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고승이 불경을 외우며 수행을 하고 있다
수행을 마친 그가
법당 뜨락에 홀로 핀 질경이의 이마를
감로수로 적셔 준다
산신각 아래 약사여래보살은 수다스러운
바람에게도 한 줄의 법문을 보낸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몸을 비운다
항아리 속에서 오랫동안 뜬 눈으로 살아온
목어, 마른 몸을 더 말리고 있다
석등에 저녁이 채워져도 불전함은 여전히
바람만 가득하다
세상의 풍문이 그를 흔들어도, 청아한
풍경소리만 들릴 뿐,
오늘도,
고승의 자세는 미동도 없는 산 중턱에
철탑이다
찬바람이 나를 깨우던 날,
그 몸속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부처의
미소가 가득 찬 암자였다
2021년, 『시현실』, 가을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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