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정계원 시인/ 빈 항아리

정계원 시인 2021. 9. 27. 22:29

 

2021년 '시현실' 가을호<이 계절의 시인>p229

 

 

 

 

빈 항아리

 

정계원

 

 

오랫동안 몸을 비우고 장독대에 앉아 있는

그의 몸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고승이 불경을 외우며 수행을 하고 있다

수행을 마친 그가

법당 뜨락에 홀로 핀 질경이의 이마를

감로수로 적셔 준다

산신각 아래 약사여래보살은 수다스러운

바람에게도 한 줄의 법문을 보낸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몸을 비운다

항아리 속에서 오랫동안 뜬 눈으로 살아온

목어, 마른 몸을 더 말리고 있다

석등에 저녁이 채워져도 불전함은 여전히

바람만 가득하다

세상의 풍문이 그를 흔들어도, 청아한

풍경소리만 들릴 뿐,

오늘도,

고승의 자세는 미동도 없는 산 중턱에

철탑이다

 

찬바람이 나를 깨우던 날,

그 몸속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부처의

미소가 가득 찬 암자였다

 

 

2021, 시현실, 가을호 발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