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2

심은섭 시인/ 회항하지 않는 강

그가 바다로 떠나가던 날,  흰 눈이 내렸다  전나무들은 하얀 얼굴로 허리 굽혀 서 있었다   봄은 두꺼운 빙벽을 뚫고 어김없이 돌아왔다 제비도 약속을 한 것 처럼 돌아와 처마 밑에 사글세를 얻어 놓고 산다 황급히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자정을 통과한 시곗바늘도 아침 아홉시로 되돌아왔다   지난여름에 피었던 패랭이꽃도 한 평 남짓한 우편취급소 주차장에 또 피어 있다   하지만 내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정면을 바라보며 바다로 떠났던 강물은 천 개의 밤을 몰아내던 달이 떠올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월계관을 쓴 내가 회전의자에 앉던 날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식어 가는 아궁이에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불을 지피는 봄이 와도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바다로 나가 강물의 신발 문수를..

내가 읽은 시 2024.05.20

심은섭 시인/ 궁서체의 여자

궁세체의 여자 허기에 찬 굴둑에 저녁연기를 피워 내려고 그녀는겨울나무처럼 서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불현듯 얇아진 귀에 들려오는 풍문으로 사치와 부귀를 초서체로 써 보았지만풀잎처럼 흔들릴 뿐,붓끝에 젖은 먹물보다 봄은 더 어두워만 갔다반칙은 타락을 낳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다시 진지한 생의 획을 그어 보려고빈 들판으로 나가 새의 발자국을 주워 오거나사랑가를 부르다 죽은 매미들의 목록을 찾아 나섰다달빛이 수수밭에 벗어 놓고 간유행을 타지 않은 푸른 새벽을 데려오기도 했다폭설이 내리는 날에 예정된 상견례로궁핍과 정중한 악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삼색 볼펜으로 밤의 수염을 그리지는 않았다은자령에 뭉게구름이 걸어놓은 자유 한 벌이나보릿고개를 넘다 해산한 대추나무의 꽃잎 한 장도탁발하지 않았다어둠에 그을린 달..

내가 읽은 시 202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