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4

정계원 시인/태풍에 도끼눈이 있다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어깨가 넓은 관공서로부터 행사홍보용 현수막을 철거하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철거하던 그곳에 갔을 때, 생의 난간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치는 현수막을 보았다 저 도끼눈에는 자비란 없다 꺾이지 않으려고 땅에 허리가 닿도록 굽혔다가 다시 뒤로 젖히는 호객풍선, 비닐봉지도 감나뭇가지에 걸려 온몸으로 저항하며 떤다   그럴수록 도끼눈은 떼를 지어 몰려와 아우성치는 그들을 죽음의 굴레로 씌우고 있다 중천을 걸어가던 낮달마저 걸음을 멈추고 납빛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골전된 한 장의 현수막이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어떤 순찰차도 구급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손톱이 다 빠지도록 몸부림치지만, 봄 같은 어떤 손길 하나 보이지 않는다  -..

나의 울음소리 2024.06.28

정계원 시인/ 초허의 목격자들

나의 거문고가 운다그 악기가 울 때면 초허가 지상으로 출현한다그 악기가 울 때면 돌이 피고, 성좌가 영글고그 악기가 울 때면 빈 들판이 사라지고그 악기가 울 때면 실명한 호수가 눈을 뜨고, 파초의 꽃이 핀다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눈빛이 살아나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고독이 죽어가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이별이 여물어가고그 꽃이 필 때면 초허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그 문이 열릴 때면 초허의 뒤안길이 보이고그 문이 열릴 때면 검은 바람이 찾아오고그 문이 열릴 때면 초허가 떠나가고그 문이 열릴 때면 제비꽃이 초허를 찾는다 여섯 개의 현과 파초, 그리고 하는,38선과 진주만의 목격자로 내가 남는다     -출처 : 2024년 『시와 시학』 여름호 발표작

나의 울음소리 2024.06.28

심은섭 시인/ 북쪽 새 떼들

새 떼들이 뱀 눈알로 날아간다  북쪽으로 간다  청호동* 우체통에서 나와 묘향산 우체통으로 가지만 그  사연 받아 줄  사람, 있을까   50년대 초 화약 냄새 자욱한 어느 겨울, 새 떼들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남쪽 밤하늘에 슬픈 보석으로 박혀 있다는 이야기와 일곱 살배기 새 떼가 어느새 은관銀冠을 쓰고 어린 염소 목청으로 "오마니 오마니" 부르다가 틀니 벗어 놓고 유셩이 되어 대기권 밖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갯배에 질긴 절망을 싣고 나르던 청호동 늙은 새 떼들도 "가가이 오라 더 가까이 오라"고 하면서(통일이여 통일이여) 녹슨 철책선 넘어 들국화 핀 본적지를 바라보며 비문이 없는 무덤의 주인이 된다는   늙은 새 떼들의 새 떼들이 가지고(사연을)  묘향산 우체국 앞마당에 풀어 놓지도 못한 채  우체통..

내가 읽은 시 202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