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90

정계원 시인/부흥새와 초허

부엉새와 초허 정계원 강릉군 사월면 노동리 71번지에 어둠이 짙게 내린 저녁 다섯 살 된 한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부엉새 울음소리가 귓불에 가득 고이는 밤, 덕실리에 품앗이갔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다 등잔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친구는 적막뿐이고, 등잔불은 문밖의 짐승 우는 소리에 흔들리고 있다 풀벌레소리가 섬돌 위에 하얗게 쌓인다 고요 한 겹이 아이의 무릎 위에 더 쌓여도 아이는 기다림에 흔들리지 않는다 달빛에 비친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감나무, 그 나뭇가지에서 아이의 불안을 키우는 부엉새, 먼 길 치맛자락 끄는 소리, 등에 달빛을 가득 지고 오는 어머니, 문종이에 싸인 약과를 내준다 아이가 달려드는 품이 봄날 같아서 눈물이 저녁강처럼 흐른다 밤이 깊어도 부엉새 울음소리가 자장가로 들리는 엄마..

나의 자작시 2024.01.05

화석에 가을여자가 피었다

화석에 가을여자가 피었다 정계원 검은 돌에 내가 국화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지하 어둠이 수억 년 동안 내가 먹고 자란 저녁밥입니다 암반 밑에서 물방울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끔, 세상 밖 사람들의 신발 끄는 소리도 들려왔지요 그럴수록 이 어둠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죽순처럼 자랐습니다 그러나 돌에 핀 국화꽃이 되기 위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에 얼굴을 묻고 한평생 살았지요 두 눈이 실명되도록 돌에 핀 국화꽃이 되려고 했으나 신은 나의 업을 씻어주지 않았지요 어느 날, 돌 깨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사람들의 검은 손이 지하의 내 몸쪽으로 뻗어왔습니다 침묵의 어둠마저 더 채울 수 없는 이곳, 한 줄기의 낯선 빛이 내 몸에 닿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영혼이 시들지 않는 돌꽃으로 피었습니다 2023 계간지 『시산맥』 ..

나의 자작시 2023.10.17

교통안내 표지판

교통안내 표지판 정계원 주문진 장덕리 복사꽃마을 어귀에 그녀가 홀로 서 있다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나를 인도해 주려고, 무덤으로 갈 때까지 서 있다 폭설이 내려도 하굣길에 서서 나를 기다린다 온종일 매의 눈으로 먼 길을 떠나는 나의 사주를 살핀다 그때, 베링해의 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새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웃음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는 줄로 알았으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내 목덜미에 주름이 질 때 석양이 귀띔해 주었다 지금은 내가 두 아이의 안내표지판으로 서 있다 아니다 어머니가 서 있는 것이다 오래된 안내표지판 어깨에 붉은 녹물이 흘러 내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포효하며 온 세상을 적시고 있다 2023 가을호 『시와시학』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3.10.17

층층나무단풍

층층나무단풍 정계원 이마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들이 핏빛 같은 함성을 지르며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나는 매미가 울던 자리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춤을 추며 나에게로 내려오기까지 그들은 영혼을 태우며 8월을 통과했으리라 가끔, 우박이 그들의 가슴을 관통하는 상처와 가을비에 붉은 울음을 풀어내는 일도, 무서리에 잎맥이 체중계 바늘처럼 떠는 날도 있었으리라 때론, 벌목공들의 톱날에 직립의 나무들이 쓰러지던 날엔, 산에 적막이 쌓이거나 가슴 조이며 밤새 몸을 뒤척이기도 했으리라 이젠 허공을 가로지르던 기러기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흰 눈이 거리에 인적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시간에 지친 붉은 그들, 다시 초록을 꿈꾸며 12월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2023 가을호 『시와시학』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3.10.17

환상의 피아노

환상의 피아노 정계원 김동명문학관 세미나실에 피아노 한 대가 혼자 앉아 있다 내가 책상에 앉아 오수를 즐기는 동안 한 사내가 하늘에서 내려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주자의 손가락을 바라보던 파초들이 귀를 펄럭이며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다 벽에 걸린 액자는 반주에 맞춰 ‘내마음’을 따라 부르고 있다 지나가던 바람도 따라 흥얼거린다 연주자를 지탱하던 의자도 일어나 춤을 추는 듯 하다 키가 큰 파초는 초록치마자락을 흔들며 탱고 춤을 춘다 피아노 소리에 『나의 거문고』 시집 속의 활자도 일어나 노래를 한다 바람에 유리창이 몹시 흔들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피아노만 있고 초허는 사라지고 없었다 2023. 『문예운동』 통권159호 가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3.10.17

붓다의 경전을 만나다

붓다의 경전을 만나다 정계원 초파일에 아이들의 사주에 이끼가 끼지 안케 하려고 도계 황조리 마을 도덕정사 붓다를 찾아갔다 동자승이 목어를 두드리며 산기슭에 숨어 사는 산짐승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그때 깊은 계곡에서 내려온 열목어가 불전함에 정화수 한 바가지를 보시한다 어젯밤, 도시의 뒷골목에서 찾아와 법당을 서성거리던 쉰바람과 함께 나는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잣나뭇가지에서 108배를 드리는 청설모, 아랫마을 짜장면집 철가방이 달아 놓은 연등도 보인다 밤 열두 시의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던 법당의 촛불은 눈이 충혈되어 있다 오늘따라 암자의 담장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붓다의 설법으로 들린다 늪의 발을 씻어주던 연꽃이 잘 왔다는 듯이 초록 귀를 펄럭이며 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문학매거진『시마』2..

나의 자작시 2023.10.17

계간 『시마詩魔』 제17호, 2023년 가을호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정계원/계간 『시마詩魔』 제17호, 2023년 가을호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 https://dohun.kr/news/?uid=34&mod=document 계간 『시마詩魔』 제17호, 2023년 가을호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계간 『시마詩魔』 제17호, 2023년 가을호에 선정된 작품입니다. 작품명을 기준으로 나열했습니다. 시마 신작시 고안나 하필이면 권순학 고시원 김지란 불안한 자유 박옥위 비슬산 능금, 삽화를 dohun.kr

나의 자작시 202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