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작시 90

요양원 뜨락의 노파/정계원

요양원 뜨락의 노파 정계원 하얀 지붕 아래에 은관을 쓴 촌로가 산다 그녀는 정수리를 태우던 긴 여름을 통과하고 영하 40℃의 빙하기를 이기려고 설해목으로 서 있는 설송이다 밤낮으로 어린꽃들의 마른 영혼을 적셔주는 강물이다 하지만, 그의 생은 듣고도 듣지 못한, 보고도 보지 못한 바위이며,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시집살이다 그녀는 극빈의 허물을 벗으려고 밭고랑에 앉아 허드렛 울음이 된다 저녁마다 징으로 어둠을 깬다 어금니를 깨물며 살아온 팔순의 9부능선, 지금은 그녀가 붓다의 미소로 빚어낸 황금빛 만월이 되어, 요양원 뜰 아래에서 수의를 깁고 있다 2022년 『시현실』 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2.03.26

눈꽃/정계원/

눈꽃 정계원 꽃이 꽃으로 피지 못한 채, 시간으로 사라진 꽃들이 있다 그는 시든꽃이 되지 않으려고 칸트의 철학을 탐독했으리라 깨알 같은 경제지 칼럼을 무수히 읽었으리라 음지에서도 꽃술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천 개의 촛대를 녹이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열독했으리라 빙하의 계곡을 수천 번 순례를 했으리라 어둠 속에서 꽃으로 몸을 풀어내기 위해 온몸을 냉동시켰으리라 베링해의 푸른 눈발이 정수리에 쌓일 때 비로소 꽃이 되었으리라 화려하게 살다가는 순간의 몸짓, 짧고 굵은 생의 꽃이다 2022년 『시현실』 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2.03.26

정계원 시인/북극의 루루淚淚/야단법석

북극의 루루淚淚 정계원 아이스아메리카노의 머그잔 속에 그의 눈물이 고여있다 그곳엔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유빙들이 고아처럼 떠다니고 설원엔 흰곰의 발자국들이 모두 시들어 있다 빙하가 눈물을 흘릴수록 섬들이 가라 앉는다 시력을 잃은 별들마저 베링해 속으로 사라진다 매연을 가득 실은 지구는 여전히 공학전자계산기를 두들기며 돌고 있지만, 그곳엔 동상에도 걸리지 않던 미나리아재비의 두 볼이 얼어있다 천년 동안 감추었던 그의 등뼈가 드러나고 지구가 온통 염천이다 천연덕스럽게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냉풍을 주문한다 나는, 『see』 2021년 12월호 발표작품 야단법석 정계원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207-3에 갓바위가 팔공산 법회를 열고 있다 그곳, 생의 F학점을 받은 5월의 청개구리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

나의 자작시 2021.12.07

정계원 시인/산 하나가 무너지고

산 하나가 무너지고 정계원 산모 산달 같은 산 하나가 또 무너지고 있다 몇 개의 산을 갉아먹은 포클레인의 몸집이 비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럴수록 세상은 먹빛 저녁으로 자라나고 메꽃 정강이의 상처가 덧나고 있다 수십 년 그 자리를 지켜온 물푸레나무들 밤마다 요란한 기계소리에 잠 못 들고 있다 금강초롱은 선친의 무덤을 빼앗긴 채 오늘도 식사를 전폐한 상태이다 죽음의 냄새를 맡은 고라니는 이제 마지막 털갈이를 하지 않는다 둥근 지구가 정사각형의 골다공증을 앓는 지금, 비는 내리지 않고 사람들의 폐 속으로 황사가 떼지어 몰려온다 동사무소가 일찍 잠든 밤 금강소나무들의 비명이 지천으로 떠다닌다 2021년, 『시현실』, 가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1.09.27

정계원 시인/젖은 말뚝

2021년 '시현실' 가을호p229 젖은 말뚝 정계원 경포습지에 나의 DNA를 닮은 말뚝 하나가 수척하게 박혀 있다 DNA를 건넨 중년 능금의 한쪽 손목을 6·25가 앗아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던 가난이 나를 공단 노동자로 보내려고 했다 그때 하늘이 검은색으로 보였다 열두 살의 앳된 능금은 한 손에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엔 구로공단 구인 전단지를 들고 있다 칠순의 말뚝은 진학을 원했지만, 중년의 능금은 공단을 요구했다 앳된 단발머리 능금이 가출의 언덕에서 홀로 펄럭일 때, 칠순의 말뚝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성황당으로 달려가 빌며, 나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산을 넘어가던 칠순의 말뚝은 앳된 능금에게 새벽을 데려다 주었다 지금은 온몸이 젖은 채 ..

나의 자작시 2021.09.27

정계원 시인/ 빈 항아리

2021년 '시현실' 가을호p229 빈 항아리 정계원 오랫동안 몸을 비우고 장독대에 앉아 있는 그의 몸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고승이 불경을 외우며 수행을 하고 있다 수행을 마친 그가 법당 뜨락에 홀로 핀 질경이의 이마를 감로수로 적셔 준다 산신각 아래 약사여래보살은 수다스러운 바람에게도 한 줄의 법문을 보낸다 그럴수록 항아리는 몸을 비운다 항아리 속에서 오랫동안 뜬 눈으로 살아온 목어, 마른 몸을 더 말리고 있다 석등에 저녁이 채워져도 불전함은 여전히 바람만 가득하다 세상의 풍문이 그를 흔들어도, 청아한 풍경소리만 들릴 뿐, 오늘도, 고승의 자세는 미동도 없는 산 중턱에 철탑이다 찬바람이 나를 깨우던 날, 그 몸속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 부처의 미소가 가득 찬 암자였다 2021년, 『시현실』, 가을호 ..

나의 자작시 2021.09.27

정계원 시인/ 508호 6인 병실

508호 6인 병실 정계원 축 늘어진 남성용 가죽벨트처럼 침상 위에 생의 광대들이 누워 있다 비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새벽 인력시장을 찾아 헤매던 1호 침상의 청호동 갯배는 일상의 속도를 잃어버린 채 링거액으로 몸을 적신다 10㎝ 두께의 어둠이 찾아와도 어화를 밝히며 만선으로 돌아오던 2호 침상의 주문진 등대, 밤새도록 허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처럼 뒤척인다 세월의 강을 건너다가 멈춰 선 늙은 시인을 닮은 3호 침상의 사천물개바위는 링거액이 꽂힌 누드와 거울처럼* 61㎖의 고독을 마시며 18평 아파트로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흥남부두를 떠나올 때 빈곤의 도시락에 고향의 흙냄새를 담아온 4호 침상의 아바이는 가위에 눌린 채 만성 향수병에 감염되어 고통을 다스리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에 독립선언을 외치던 5호 침상, ..

나의 자작시 2021.09.18

정계원 시인/ 윈도 마네킹

윈도 마네킹 정계원 몸속으로 혈액이 흐르지 않는다 사계절의 쇼를 보여주는 일이 내 업이다 삼월에는 어깨에 봄을 얹어 놓고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당겨야 한다 사람들의 눈길이 다가오지 않을 땐 립스틱을 짙게 바르거나 가슴에 장미꽃을 꽂고 기다려야 한다 팔월에 장마전선이 온다는 풍문이 나돌 때면 이미 나의 치맛자락은 짧아지고 가슴에 여름이 풀어지고 있다 냉방장치가 있으나 팔월의 쇼를 보여야 하므로 매미울음소리로 삼복더위를 식혀야 한다 시월이 오면 두 어깨에 낙엽들이 쌓이고 짧은 치마가 더 길어진다 몸에 걸친 무명천 속으로 들짐승들은 동면에 들기 시작한다 그럴 때면 고독의 가슴을 태워야 하는 나는 봉화대가 된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12월, 발등으로 흰 눈이 쌓이고 찬바람에 살을 에이는 나의 영혼은 점점..

나의 자작시 2021.09.18

정계원 시인/ 블랙롱코트

블랙 롱코트 정계원 벽장 나무옷걸이에 내가 베짱이의 얼굴로 걸려있다 그러므로, 강물처럼 직선으로, 혹은 뒤돌아 걸어 본 적이 없다 각혈하는 단풍처럼 붉게 울어 본 적도 없다 뭉게구름처럼 여권 없이 국경선을 넘어 본 적은 더욱 없다 깃대의 깃발처럼 허공에서 찢어지도록 펄럭거려 본 적도 없다 또 그러므로, 두 눈이 충혈되도록 밤새워 짠 그늘을 행인들에게 내어 준 적도 없다 마트의 입간판처럼 24시간 뜬 눈으로 새벽을 찾던 날도 없다 통닭처럼 기름가마솥에 발목을 넣어 본 기억이 없다 정신이 혼절한 사막의 이마에 비 한 방울을 뿌려 본 적이 없다 암자의 목어 소리가 잠든 나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2021년 『시와반시』 가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1.09.10

정계원 시인/ 동백꽃개론

동백꽃개론 정계원 그들은 오동도에서 얼굴을 맞대고 산다 외투를 벗은 맨살로 붉은 생의 궤적을 그린다 한때는 수도꼭지의 입술이 터지는 추위와 맞서 싸우며, 두 눈이 실명된 날도 있었으리라 눈을 뜨지 못하는 씨앗에게 건넬 신의 계시를 찾아 암반 밑으로 뿌리를 내렸으리라 아니다 그믐달의 치맛자락이 서산에 가까워질 때 긴 칼을 찬 뒷골목 그림자들이 지하방에 감금시켜도 푸른정신으로 끝내 두 무릎을 꿇지 않았으리라 2월이 겨울강을 건너왔다고 잔설이 전해주던 날, 삼천궁녀가 절벽으로 온몸을 날리듯 그도 지상으로 낙하한다 그들의 목숨이 붉은 목숨으로 부활하고 있다 2021년 『미네르바』 가을호 발표작

나의 자작시 2021.09.10